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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득도'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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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1.♡.87.103) 댓글 0건 조회 5,592회 작성일 09-05-09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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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 31일에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섰다. 이는 내 습관, 일상, 익숙한 것에 안주하는 삶을 벗어나고자 했던 이유도 하거니와 환경문제에 대해서 사람들이 너무도 관심이 없어하는 통에 이를 좀 구체적으로 알리고자 함이었다.

배낭에 숙식장비를 챙거 구걸에 노숙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고 있는 처지는 일상생활하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어차피 이것 자체가 나에게는 일상이 되어버렸으니...

어쨋튼 길가는 중에 얻는 큰 소득 중의 하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일상을 털고 세상을 떠돌다 보며, 우연하게 혹은 그럴만한 이유로 ‘특이한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얻곤 한다. 1주일 쯤 전 그런 분 하나를 만났다. 우연히 인터넷을 휘젓고 다니다나 내 활동을 알게 되어 관심을 가지고 계시 단다. 그래서 지하철로 한시간 거리를 찾아오셨다. 의정부 도서관 앞에서 정오에 만났다.

이분은 내가 본 바로 ‘뚜껑’이 열린 분이었다. ‘뚜껑이 열렸다’ 함은 일반적인 의미의 ‘화났다’라는 의미가 아니라, ‘무의식의 봉인이 풀렸다’는 말이다. 인간의 의식 밑바닥에는 엄청난 무의식이 깔려 있다. 하지만 그 무의식이 아무 때나 풀어 헤쳐져 버리면, 집단생활에 용의하지 않다. 생각나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그에 대한 어떠한 ‘이성적 책임’마저도 없다면, 인간의 삶은 혼란과 분열이 가득할 것이다. 하여 인간의 뇌는 진화 과정에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면에 이를 조절할 수 있는 ‘뚜껑’을 만들어 냈다. 문제는 이로 인하여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잠재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과의 조화롭고 통합적인 관계 맺음을 할 기회를 잃어버리고, 이성적 의식이 통제하는 한에서의 좁은 시야의 ‘사회적’ ‘관습적’ ‘일상적’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뚜껑 닫힌 사람들 삶의 비극이다.

이로 인해 한 개인에게 사회적 통속, 일상의 가치, 개인주의, 물질적 가치, 경쟁심, 성공 등등의 가치와 개념들은 합리화 되고 오직 이것을 위해서 이것에 통제되어서 살아가는 인간이 만들어 진다. 뚜껑 아래의 ‘무한의 세계’를 알지 못하기에 눈으로 보이고 귀로 들려지는 한에서의 편협한 세상에 대해서만 병적으로 집착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자유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는 ‘뚜껑을 (적절히)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렇게 무의식을 억압하고 정신을 편협이 구조화 하는 현대 사회의 억압은 훈련에 의해서도 극복되지만, 종종 외부의 집중적 자극이나 때로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극복되기도 한다. 이때가 바로 뚜껑이 열리는 때이다. 이런 이들의 증세는 각양각색이고 각양각색의 문화권에서 각양각색의 언어로 정의되어지곤 한다. 이들은 주로 ‘무의식이 해방된 이들’ ‘통찰적 직관을 얻은 이들’ ‘신내림 받은 이들’ '견성한 이들' 등으로 일컬어지는데 본인(둥글이)은 그 현상의 ‘장단’이 있음을 알기에 무턱대고 긍정적 의미보다는 ‘뚜껑이 열린 상태’라는 다만 기술적인 상태로 정의하고자 한다.

하여간 그렇게 뚜껑이 열린 인물을 이날 점심 의정부 도서관 앞에서 만났다. 우선 이분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시야가 트인 ‘그 날’ 이후로, 그간 가져 왔던 세상에 대한 관계가 완전히 재정리 되었다고 한다. 세상에 대한 분노 절망, 가정사의 잡다한 불만 등등이 한순간에 다 사라지고 ‘이해와 조화 사랑’의 마음이 가득해지게 되었다고 한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삶도 전혀 다른 패턴을 띄게 되었다는데, 우선 그간 다니던 교회에서는 얌전하고 조용한 신도로 살아왔다가 ‘그날’ 이후로 갑자기 방언을 하고 수화를 하고 하면서 교회 내에서 정신병자 취급까지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보통 뚜껑 열린 사람들이 종종 과도한 편집증 혹은 망상증 증세를 보이거나, 극단적인 관념론적 사고(물질은 필요 없고 정신의 해방만 중요히 여김)에 매몰되는 특성을 가진 것과 달리, 이분은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까지 실천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흔히들 뚜껑 열린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한 그 무한한 해방감을 단순히 그 해방적 자유감으로 끝맺거나, 그 전까지 안보이던 전혀 다른 그 무엇인가를 보게 되었음으로 인한 충천한 자부심으로 인하여 망상증 증세를 보이곤 한다. 이들은 자신이 얻은 천재일우의 기회를 감상적 환희 속에 날려버리는 인물들이다.

이런 이들은 백날 뚜껑 열려봤자, 결국은 도로아비타불 되는 인물들인데, 이날 만난 분은 자기 해방감과 자기 믿음에 빠져 결국 자기를 잃어버릴 수 있는 한계를 파악할 수 있게 면밀한 주의감을 가진 이였다. 하여 둥글이를 만나로 온 이유도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활동 중의 하나를 하고 있는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신을 좀 더 견고히 하기 위함이란다.

여자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준비가 된다면 훌훌 털고 나와 같은 거렁뱅이 생활을 하고 싶단다. 집을 나올 때는 늘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나온단다. ‘큰 자각’이 생긴 후로 직장생활을 그만뒀고, 직장에 있던 자기 물건을 그대로 놓고 나왔다고 하며, 현재는 인간의 고통과 사랑을 함께 할 실천적인 방법을 찾아서, 돈벌이와 전혀 관계없는 봉사활동을 준비하는 동시에 그에 맞는 자격증 준비도 하고 있다고 하는데, 보아하니 이미 ‘집’을 떠나온 모습의 다름이 아니었다. 모든 인류와 세상의 생명을 내 가족으로 여기고 이에 맞는 삶을 살아가는 그 순간 이미 ‘세계’ 자체가 그녀의 집이 된 것이고 기존의 의미의 ‘내 집’은 이미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식사로 라면을 때우는 모습을 보면서 ‘건강을 위해서 좋지 않다’고 (수입산)밀가루 음식이 생명에 가하는 유해함을 말하니, ‘그것이 인스턴트 화 된 세상에서 인류가 겪어야할 고통이라면 그 고통을 함께 하고 싶다’고 대꾸한다. 식성이 따라주기 때문이라고 전제하면서...

물론 한편으로 인스턴트 음식을 먹지 않고 ‘멀쩡한 음식(유기농 등)’을 찾아 먹는 것이 소비시장에 영향을 미쳐서 결국 온 인류가 ‘멀쩡한 음식’을 먹을 날을 앞당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하여간 개인의 구매행위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문제의 분석은 차치하고 ‘인류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식의 발상으로 거친 음식도 마다하지 않는 그 마음자세는 분명 특별한 것이었다.

그간 들어뒀던 보험도 다 해지하고, 동생에게는 모아뒀던 돈을 다 털어 집까지 사줬기에 무일푼이지만, 이에 대해 아무런 불안감이 없고, 있는 대로 살아가다가 병이 걸려 죽을 때가 된다면 마땅히 하늘의 뜻에 따라 죽어 사라져야 하지 않냐고 덤덤히 얘기한다. 이에는 어떠한 호기나 자부심 같은 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냥 평이하면서도 차분하게 자신의 현 상태를 관조할 뿐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생로병사는 그 삶에 별다른 걸림돌을 주지 못하는 그것인 듯 했다. 오직 어떻게 세상에 올바르게 반응하면서 자기의 지금을 충실히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생각만 들어차 있었다. 조급하거나 경박하지 않고 차분하면서도 면밀하게.

흔히들 ‘견성’ ‘득도’ ‘깨달음’ ‘구원’을 얻었다는 자들이 그에 의해 뿜어지는 힘을 ‘관념적’으로만 되뇌임하고, ‘감정적 환희’로 발산할 뿐, 그것이 일상에서 체화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그들은 하루 세끼 먹을 만큼 먹고, 일상의 편리는 다 누리고, 심지어 사업 번성하고 있다며 자신의 ‘명민함’을 떠벌리기 까지 한다. 그들은 현대 사회에서의 인간의 고통과 분열의 근거가 근본적으로 ‘물질기반의 사회’ ‘욕망기반의 사회’의 죄악인 것을 통탄하면서 ‘변해야 한다. 깨달음-구원을 얻기 위해 힘써야 한다’고 떠벌리기만 할 뿐, 자기 자신이 현재 그 죄악의 기반인 것임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수준의 정신 상태에서 기껏 자신의 편의로운 생활을 합리화 시키기 위해서 참 깨달음(구원)은 일상 생활을 하면서 이뤄지는 것이다는 따위의 말을 짖꺼린다.(이들은 과거 2,300년 전과 지금의 차이가 뭔 줄도 모르고 죽어 무덤에 묻힌 이들의 말만 되풀이 하곤 한다.)

자기 관념과 관념적 환희 속에만 빠져 있다 보니, 세상이 운영되는 큰 그림을 볼 수 없는 것이고, 그 그림 속의 자신의 위치와 작용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게 불교도들, 노장교도들이든, 기독교인들이든 하나같이 판박이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 이런 저런 경제-환경적인 지표를 확인 해 볼 때 80만 원 이상 벌어들이는 것 자체가 환경을 파괴시키고 후손의 존립을 불가능하게 하는 삶이다. 어려운 용어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로막는 파괴행위이다. 따라서 한 달 80만 원 이상 버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죄책감’을 갖고 살면서 어떻게든 그것을 세상에 환원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문제는 자신이 ‘득도-구원’ 받았다며 떠벌리는 이들이 그러한 죄악적 삶을 ‘당연시’여기면서, “현실은 차후의 문제이다. 오직 중요한 것은 ‘득도-구원’받는 것”이라며 철저한 관념적 허상을 사람들에게 씌우는 것이다. 이런 개똥같은 믿음이, 불교도들, 노장교도들, 기독교인들에게 만연해 있다 보니, 이 세상은 더더욱 인간이 깨닫고 구원 받기 힘든 곳이 것이다.)

이는 기실 세계를 이렇게 만들어낸 ‘일상이 거세된 이성주의-관념론’의 한 폐단이지만, 정작 본인들은 자신이 오직 ‘진리’를 알고 있다고 말하며, 오히려 이를 지적하는 이들을 ‘이성론자’로 폄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루 세끼 제 입에는 안 빼놓고 꼭 밥알을 챙겨 넣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밥’을 채워주는 문제는 하찮게 여기면서, “우선 중요한 것은 득도-구원을 얻는 것이지 현실적 실천의 문제가 아니다”는 따위의 얘기를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이런 이들이 과연 참 ‘득도-구원’ 받은 이의 모습이겠는가?

이는 ‘현실적 실천의 문제가 최고로 중요하다’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 실천의 문제는 둘 째 치고, 현실속에서의 자신의 일상적 삶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도 분간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득도-구원’이라는 것이 기실은 빛 좋은 개살구라는 말이다. ‘득도-구원’을 외치는 ‘뚜껑열린 인물’들 상당수가 자신이 아는 바를 생활로 이끌어 내지 못하고 철저히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면서도 이를 합리화 시키는 ‘나르시즘’에 빠진 인물인 동시에 극단적 ‘관념론자’ 였음에 비추어 볼 때, 분명 이날 만난 분은 분명 특별한 사람이었다.

자기 자신이 깨달은 바가 세상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삶을 사는 자세...

입으로만 ‘거대한 사랑’ 운운하며 감상에 빠져 있는 한심한 씨부림쟁이가 아닌, 자아를 인류와 환경에 그대로 뻗어 하나 됨을 체현한 삶을 사는 사람. 그리 노력하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는 사람... 이날 대한 인물은 그런 인물이었다.

하간 그렇게 쉴 새 없이 다양한 주제로 여섯 시간 넘게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을 먹고 헤어졌다.

오랜만에 큰 인물을 접한 기분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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