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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우선 찾자'는 말 속의 함정

작성일 09-01-30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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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1.♡.243.79) 조회 5,80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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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함정

세상만사 갖은 사건의 연속에 휘둘려오며 도무지 해결되지 않던 문제 속에 번뇌하던 인간은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흔히 생각해 오던 ‘나’의 내면에 좀 더 깊고 어떤 근원적인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아련히 직관하게 되고, 이의 올바른 발현을 통해서 온전한 자유를 찾는 길에 발을 들여놓곤 한다.


하지만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나를 찾기(혹은 버리기)’가 주는 무한한 풍요감에 집착해 자칫 큰 오류를 범하고 오히려 ‘나’라는 관념의 함정에 갇히는 큰 실수를 할 수 있다. 문제는 일반 함정은 원하지 않음, 얽매임, 통제, 자유의 말살 등의 갖은 ‘불편’이 있기에 보편적 인간은 이를 벗어나고자하지만, 불교적-노장적인 해방을 위한 노력 끝에 찾은 ‘(깨달은) 나’라는 함정은 그곳에 ‘자유’와 ‘풍요감’이 존재하는 사실로 인하여 보편적 인간이 부러 그 속에 빠지고자 하는 곳이 된다.


이러한 불교도인들의 오류는 기독교인들이 저지르는 그것과 원리상 맥을 같이 한다. 즉 기독교인들은 그동안 ‘자기’라는 편협하고 초라한 존재성 안에 갖혀 상황과 시류에 흔들릴 수 밖에 없던 삶을 살아오며 고통받던 중에 갑자기 ‘신’이라고 하는 거대 자아를 직면하게 되고, 이 초월성이 주는 해방감으로 인해여 무한한 자유를 맛보게 된다. 문제는 그 ‘자유감’ 자체를 ‘구원’으로 착각하여 그 속에만 안주하여 마냥 주를 경배하고 추종함에 의한 기쁨 속에만 매몰된 것이다. 그들 중 상당수가 스스로 구원받았음을 자랑으로 여기지만 허고헌날 교회에 처박혀 ‘주여주여’ 하는 것이 그 구원받았음의 거의 유일한 증거인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이는 심히 ‘감상적’이고 ‘관념적’인 믿음인 바, 불교적-노장적 자유의 길을 가는 이들이 빠지는 함정도 이와 비슷하다.


이는 아마 각 종교의 핵심적 이해가 전파되기 위해서는 많은 대중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초보적 이해의 도식’이 필요했음에 이를 널리 접파시키는 와중에 각 종교의 믿음의 수준이 ‘하향평준화’된 결과가 아닌가 한다.


물론 모든 기독교인들과 불교도들이 그 함정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이들이 그렇게 진리의 길을 향하는 중간에 놓인 그 달콤한 오아시스에 정착하고 안주하지만, 그 중의 극 소수는 그 오아시스의 달콤한 기억을 뒤로하고 다시 황량한 사막을 향해 발을 내디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안락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명증한 ‘정신’과 ‘용기’를 갖춘 이들이 부족하기에 구원다운 구원, 견성다운 견성을 한 이들이 그리 부족한 듯 하다.


2. 어떤게 진정한 구원이고 견성일까?

그러면 어떻게 ‘구원’받고 ‘견성-득도’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답은 경전에 다 나와있다. 다만 내가 ‘구원’ 받았다고 여기며, 혹은 ‘견성’했다고 여기며 만들어낸 이해의 함정 속에서 빠져서 그것이 안보이는 것 뿐이다.


기독교의 ‘구원’의 의미는 ‘예수를 믿고 천국가는 것’인데, ‘예수를 믿는다’는 말의 참 뜻은 ‘예수가 그리 하라고 행하신, 그리 행하셨던 일’을 본받아 따르는 것이다. 낮은 곳에 위치하고, 사람을 섬기며, 늘 나누고 함께하는 것. 이러할 때 우리는 ‘천국이 바로 여기 있음’을 알수 있다고 예수는 설파하고 있다.

왜 그러한 말을 했을까? 이는 지금과 같이 ‘나’와 ‘너’가 나눠지고 끝없이 계산하고, 통밥 제고 하는 삶 속에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극대화되고 그로 인한 화살이 결국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이유로 바로 나와 경계를 없앤, ‘모두가 하나로 존재하는 삶’ 속에서 진정한 평화와 사랑이 존재할 것임을 그는 알았기에 이를 ‘천국’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예수가 ‘거지에게 먹을 것을 준 것은 나에게 준 것이요’라고 한 얘기도 “불쌍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줘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거지에게 행하는 일은 결국 나에게 행한 일이고 이는 나에 대한 너희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며, 아버지 하나님 아래의 하나된 가족으로서의 삶을 실현하는 노력이니라”고 한 얘기의 다름이 아니다.


불교-노장적 ‘참 나’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상당수의 신도들이 ‘참 나’를 찾고자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의 끝없는 집착과 갈망, 욕구와 번뇌를 만들어내는 ‘나’라는 존재를 없애 ‘해방감’ ‘자유감’을 느끼려는 목적이다. 하지만 이는 목적 자체가 바르지 못함으로 그 목적한 ‘참나’를 찾아 봤자, 극히 초보적인 견성 밖에 이룰 수 없다. 그정도 수준으로 추구하는 ‘참 나’는 극단적인 개인주의의와 맥을 같이 한다. 생각해 보라.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참 나’라는 것은 내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 널리 퍼져 있는 근원적인 존재, 혹은 나라는 개인성 안에 해방을 위해서 웅크리고 있는 근원적인 존재를 말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한 것 처럼, 단순한 해방감과 자유감을 갖기 위한 목적으로 ‘나’를 찾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것은 왜 나를 찾아야하는지의 진정한 이유를 모른 결과이고, 그리 찾아진 나도 다만 극단적인 개인성-관념성을 띈 그것일 뿐 ‘대아적 작용’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의 신도들이 ‘번뇌’의 문제로 절을 찾는 이유로 스님들도 그 수준에 맞는 마케팅 전략으로 ‘번뇌를 끊는 방법론’을 설법한 때문이고, 이것이 하나의 교파로 굳어지고, 문화현상이 되고 역사로 굳어지고 이후의 경전으로까지 만들어지다보니, 스님들 조차도 그 외의 다른 것을 알지 못해, 진정 필요한 중요한 것은 빼 놓은 체 가장 초보적이고 대중적으로 접근하기 쉬운 ‘해탈방법론’에만 집착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해탈은 ‘대아’할 수 있는 그것이 아니라, 극히 소극적인 의미로서의 ‘내가 괴롭지 않을 수 있는 방법론’으로서의 그것이다.


하지만 ‘참 나’ 혹은 ‘근원적인 나’는 무한의 공간과 영원의 시간의 정 중심인 내 자신을 관통해서 모든 시간대와 모든 존재와의 작용이 유기적으로 관계되어지는 작용 인자를 말한다.(이는 불교에서 말하는 ‘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공의 작용’이 실현된 ‘대아’를 찾기 위한 노력은 실로 원인과 결과가 어우러진 관계지향적이고, 반응중심적인 ‘작용성’을 담보하기 때문에,

사회적인 참여를 ‘나를 찾기’의 대립된 의미로서 해석하고 ‘나를 찾기’(견성)에만 집착하는 노력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는 폭과 의미가 훨씬 깊다. 즉 ‘사회적인 실천에 우선해서 나를 먼저 잘 찾아야 한다’는 등의 말은 애초에 ‘마음의 고통’을 없애기 위한 방법론적 측면에서 극도의 고통(강박, 결벽, 집착 증 등)을 견뎌낼 수 없는 이들에게 적용해서 우선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관념론적인(마음의 작용) 방법론’이지, 실질적이고 물리적인 세계까지를 포괄하여 어우러지는 작용을 하는 온전한 ‘대아’를 만들어내는 방법론은 아니다.


3. 올바른 구원과 견성을 방해하는 요소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사람’이다.

기독교:많은 목사들이 구체적인 구원의 역할과 작용은 얘기해 주지 않고, “예수믿으면 천국간다.”고 얘기해 주다 보니, 많은 신도들은 이를 문자 그대로 믿어 버린다. 그래서 그들은 입에 ‘믿음천국-불신지옥’을 달고 살지만, 그들이 진정 구원을 받았을리는 만무하게 여겨진다. 왜냐하면 아무리 예수믿으면천국간다고 떠벌릴지라도, 기독교적 관점에서 그 나머지 동포들의 헐벗고 굶주림(거지)을 방치하는 것은 예수를 방치하는 것이고, 이는 예수를 올바로 믿지 않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려운 사람을 돎봄’은 단순히 ‘선행’의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빈부, 너와나의 구분이 없는 온전한 천국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일상적인 삶’, ‘실천적인 삶’ 속에서 가능하느냐의 문제이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목사들이 이 본질적인 믿음을 가리키려고 하지 않고, ‘사회적 실천은 나중의 일이고 우선 구원이 중요합니다. 그러니 토요일 일요일에 복지시설 같은 곳 다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교회 열심히 다니십시오.’하는 말 자체가 넌센스인 것이다.


불교-노장:도에 좀 맛을 들인 이들이 도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건네는 참으로 몹쓸 소리는, ‘세계의 문제에 우선해서 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이다. 언듯 맞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나’는 실로 모든 세상의 중심이고, 내 마음으로부터 모든 문제가 시작되기 때문에 나를 잘 찾으면 세상에 더더욱 긍정적인 작용을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얘기는 참으로 큰 함정이다. 우선 그러한 얘기를 하는 이들 조차가 ‘성격상’ 사회문제의 난해한 작용 반작용과 외부적인 실천활동에는 천성적으로 무관심한 반면 내면적으로 에너지가 집중되는 스타일인 경우가 많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참으로 호인답고, 성격 좋고, 인상좋은데, 그것은 그들이 천성적으로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이 없게끔, 대신 자신의 심성을 돌보고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따사로운 마음을 갖게끔 태어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대부부분 불교-노장을 접하는 이들은 애초에 ‘번뇌’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얻고자 하는 이들이기에 이런 사람들의 말이 잘 들어 먹힌다. 왜냐하면 자신은 늘 인상을 쓰고 괴롭고 답답한 삶을 살아왔는데, 자기가 정말로 되고 싶은 사람의 모습 - 성격좋고, 인상좋고, 호인다운 사람이 “다른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너를 잘 찾아라”고 얘기하니 이를 맹신하게 되는 것이고, 그로부터 잘 못된 길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선 나를 찾고나서 세상을 구하라’는 따위의 얘기는 지금 내가 먹고 살기 힘든데, 누구를 돕냐? 나중에 내가 크게 성공해서 돕는 것이 서로에게 더더욱 좋지 라는 말과 같은 부류의 말이다.

생각해 보라. ‘부자되면 도와야지라’고 말하는 이들 중에서 성공하는 이들이 몇 나오지 않듯이, 도대체 몇 명이나 성공해서 이 수 많은 우리가 당장 직면한 사회문제에 참여를 하겠는가? 견성한 후에 사회적 참여를 해라는 식의 이야기는 사회적책임의 방기의 다름 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공해서 남는 돈 가지고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도움이 아니듯이, 나중에 ‘견성하고 난 후에 세상의 문제를 살핀다’는 발상 자체가 부적절한 것이다.


물론 ‘견성하고 난 후에 세상의 문제를 살펴라’고 말하는 이들이 애초에 그런 말을 꺼낼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기는 하다.

그것은 쥐뿔도 모르는 이들이 ‘진리’를 논한답시고, 섣부른 지식을 퍼트리고, 자기 자신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는 이들이 상대방을 인신공격하고 비하하고 폄하하면서 스스로는 ‘사랑을 나누고 있다’ 고 착각하는 몇몇 사례의 이들이 혹세무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 ‘견성하고 난 후에 나서라’고는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사회적 (작용)실천’의 모든 것인 것은 아니다. 기껏 그런 극단적인 사례 몇몇을 들어서 “봐라. 저렇게 자기도 못하면서 나서서 깝죽대는 것은 부작용만 일으킨다. 그러니 사회적 실천에 앞서서 너 자신을 찾으라”는 따위의 얘기는 잘 못된 것이다. 이는 사건의 포함관계를 전혀 부적절하게 인식하고 과도히 일반화한 오류이다.


그러한 사회적 (작용)실천의 문제 이외에 내 자식새끼에게 젓을 물리는 것은 물론이고, 그 옆에 있는 굶주리고 있는 다른 자식새끼에게 젓을 물리는 것도 우리가 마땅히 행해야할 ‘사회적 실천’의 사례이다. 또한 ‘자식새끼에게 젓을 물리는 행동의 확되 된 사건’인 ‘지구온난화’ 등에 대해서도 관심 갖고 참여해야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삶의 작용이 되어야 한다. 이는 깨닫고 말고와는 관계가 없는 삶의 문제로 자연스럽게 이뤄내야하는 그것이다. 당신은 당신이 깨닫기 전에 외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결과적으로 부작용을 미침으로 ‘깨닫고 난 후에’ 아이에게 젓을 물리겠는가? 이는 참으로 몽매한 생각이고 실지로 그러한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직접적인 자기 아이 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내가 깨닫고 난 후에 행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이 상당한 듯 한데, 이는 전적인 무지의 소치이다.

‘나를 깨우침’과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이해와 실천’은 동시에 수행되어야 하는 둘이 하닌 하나의 것이지 그리 나눠지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나눠서 자각하는 동시에 앞선 간난아이 사례와 같은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기실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를 하는 것 자체가 온전한 ‘대아’의 기회를 연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들 ‘나를 들여다보는 노력’=‘마음의 문제’로, ‘사회적 실천’=‘물리적 활동’이라고 전제한 후에 ‘마음의 문제가 중요하니 나를 들여다 보는 노력을 먼저 해야 한다’고 여기는데, 이는 부적절하다. 사회라는 것은 전 세계에 있는 ‘나’가 확대 반영된 복잡 다다한 구조체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바른 집중과 이해는 ‘나’를 좀 더 폭넓은 차원에서 들여다보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 더군다나 구체적 사회 실천의 노력을 통해서 그 이해는 ‘실존화’되기까지 한다. 면벽수행을 통해서 ‘나’를 들여다보려는 노력이 상당히 관념화되는 것과의 차이가 여기에 빚어진다.


더군다나 이러한 ‘사회적 실천’을 단순히 ‘내가 세상을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로 어우러져 살 수밖에 없기에 당연히 그리 이뤄내야하는 삶’의 의미로 이해해서 결국 세상일이라는 것이 나의 일의 다름이 아님을 인식할 때. 즉 지속적인 의식의 확대와 반복되는 실천을 통한 ‘체화된 앎’으로 견고히 해낼 때, 거기에는 어느세 나와 너의 경계는 무너지고 오직 ‘대아’가 존재함을 확인하게 된다. ‘자기의 개인적 생활’을 투자해서 세상을 위해 나서는 순간순간의 노력이 나와 너의 경계를 무너트리는 행위가 됨을 명심해야 한다. 오히려 사회적 실천은 참 나를 찾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물론 모든 사회적 실천이 그리 대아를 깨우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다. 내 자신을 사회-인류로 확대하기 위한 명증한 이해와 의지와 실천의 과정 속에서만 그것이 가능하다.


이로 인한 결과는 명확하다. ‘견성’하기 위해서 면벽수행을 하는 이의 ‘깨달음의 순간’은 다른 아무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는 그야 말로 ‘관념적 성과물’에 불과하지만(주로 벽 앞에서 “아하 이거구나!”하며 손바닥을 치는 등),

사회적 실천을 통해서 자아를 실존적으로 확대해 나가려는 이들이 온전히 ‘대아하는 순간’은 그 축적된 ‘작용성’의 결과로 인해서 실질적인 현실작용‘까지’를 이뤄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세계의 문제보다는 나를 아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면벽수행)는 이해를 가진 이들의 그 관념적 성과물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는 우선적으로 개인에게만 귀착되는 한계가 있지만, 그들의 깨달음이 허사는 아니다. 그리 깨달음을 얻고 득도를 한 이들은 다음 단계의 수행을 통해서 분명 세상을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애초의 이들의 진리추구의 목적 자체는 애초에 ‘어떻게 하면 내 번뇌를 끊을 것인가?’라는 식으로 개인성의 충족에 있기에 필연적으로 그리 추가적인 단계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깨달음의 순간 모든 삶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믿는 것은 허황된 것이다. 면벽수행에 있어서 깨달음과 삶은 연관은 되어 있지만, 깨달은 후에도 그에 맞는 삶을 사는 연습을 해야한다. 하지만, ‘대아적 삶’을 이뤄내기 위한 실천적 노력을 시작하는 사람들은 그 깨닮음에 비례해서 삶이 자연스레 살아진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올바로 대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올바로 질문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문제가 확대된 구체적인 사회현실을 올바로 고민하고 그 숙에 뛰어들어 작용(실천)함으로 그 '질문'의 옳고 그름을 실존적으로 검증하는 것이다.

올바로 질문할 능력을 길러야 함은 세상이 너무 잡다한 말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끝없이 그 잡다하게 널려진 말들을 음미하고 비교 대조하며, 자기 내면의 작용을 살피면서 그 명증성-작용성을 성실히 살펴 좀 더 온전한 곳을 향하려는 노력의 필요함이고,
구체적인 사회현실 속에 작용(실천)해야 함은 올바로 존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권위’에 의존하고, 그럴싸하게 보이거나, 아포리즘에 환호하며(짧고 경쾌한 문구), 감성으로 받아들이 것에 후한 점수를 줄 뿐이지, 면밀히들여다 보려고를 하지 않는다. 사회적인 실천이 필요없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참조 - 득도, 견성한 사람의 특징으로 얘기되어지는 사람의 특성으로 ‘호인다움’ ‘느긋함’ ‘포용력’이 얘기되어지곤 한다. 그리고 이런 특성을 기준으로 ‘당신 아직 견성하지 않았었어!’라는 기준이 천연덕 스럽게 사용되어지곤 한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끝없는 집착과 갈망, 욕구와 번뇌를 만들어내는 ‘나’라는 존재를 없애 ‘해방감’ ‘자유감’을 느끼려는 목적으로 ‘참 나’를 찾았을 때는 누구라도 그런 모습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이 이것이 ‘대아’한 것은 아니고, 그러한 목적으로 방법론의 결과로 얻을 수 있는 견성의 초보적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받았다고 믿은 후에 180도 달라져서 늘 포근한 미소와 자비의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는 기독교인들을 보면 자신의 모습이 거울로 비춰질 것이다.

오히려 제대로 ‘대아’한 사람이라면 세상의 몸부림과 고통에 함께 휘둘리고 고통스러워하며 때론 절규하고 분노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이런 세상의 처참함에 아랑곳 않고 시종일관 여유있고 흔들리지 않음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견성으로까지 여기고 이를 맹목적으로 쫓으려는 이들이 넘쳐 남에 참으로 헤괴히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살이 눌리워지고 찟겨질 때 이에 고통스러워하며 신음하는 것이 당연하듯, 세상의 그것에 함께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몸부림치고 신음하는 세상의 모습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늘 포근한 미소 뿐이라면, 그는 ‘대아’한 것이 아니라, 세상과 담을 싼 것이나 다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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