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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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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프렌드 (218.♡.186.215) 댓글 2건 조회 6,238회 작성일 06-03-1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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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다니는 회사가 조계사 근처라 제 출근길은 대방역에서 종각역까지의 동선을 그리고 있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에 구두 뒷굽으로 지구위에 선을 그었다가 다시 원래 그었던 시작점으로 돌아 긋는다고 보면 되겠지요.

대중교통을 이용한 출근길에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지하철에서 만나는 사람들이야 매일 매일 다른 사람이겠지만 넓게 생각해보면 저에게는 행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서 늘 같은 이들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저도 그들에게는 출근길의 행인으로 뭉뚱그려 보여지겠지요. 도시 생활이 뭐 이렇게 하루하루 빠듯하게 너도 나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매일 아침 종각역에는 만나자 헤어지는 뭉뚱그려 사라지는 행인이라는 만남 뿐 만 아니라 저에게는 특별한 만남이 있습니다.

이 분은 매일 아침 종각역 조계사 방향 출구에 서서 동냥을 하고 있는 맹인 아저씨입니다. 늘 똑같은 하얀색 운동화, 밤색바지에다가 검정색 두터운 파카, 검은 안경에 귀에는 이어폰을 꼽고 있지요, 가끔 아저씨가 무슨 음악을 듣고 있을까, 장윤정의 짠짜라일까 아니면 놀랍게도 팝페라 가수의 노래가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하기도 합니다.

아침 출근길에서 뭉뚱그려 행인이라는 등장인물에 동냥을 하는 검은 안경의 아저씨가 특별배역으로 저의 일상에 들어온 것이지요.

그런데 제 맘이 넉넉지 못하여 아저씨의 비어있는 동냥 바구니를 무심히 지나친 출근길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이 아저씨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적극적으로 동냥을 구하는 스타일도 아니었지요, 그냥 동전 바구니를 들고서 이어폰을 귀에 꼽고 관절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가끔 이리저리 다리를 흔드셨는데 이 모습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아무튼 저의 출근길 그림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시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아저씨의 비어있는 바구니가 자꾸 제 맘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적선을 할 까 하며 주머니에 손을 넣다가는 얼마를 드려야 하나, 너무 작다고 불평하지 않으실까... 그러다가 에이 뭐 내 주제에 적선이야 하면서 또 지나친 적이 몇 번 되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맘이 개운치 않았던지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문득 지금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그 동전을 모두 드리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손을 넣으니 마침 500원 동전과 백원동전 한 두개가 있어서 아저씨 바구니에 조심스럽게 놓아드리고 부끄러운 듯 도망쳤었습니다. 혹 적다고 핀잔하지 않을까 걱정스런 맘이 든 게지요.

이렇게 시작된 첫 경험이 이제는 나름대로 그 아저씨와 나 사이에 말없는 계약이 되어서 가벼운 맘으로 아저씨 옆을 지날 수 있고 마침 동전이 있어서 그 바구니에 조금이나마 채울 때는 마냥 기쁘기도 했었습니다. 같이 더불어 살아야겠다는 그 한맘을 내어 본다는 것이 그 날 하루를 가볍게 하였던 것이지요.

물건을 사고 또 먹는 것들이 대부분 카드결재라 동전이 생길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간혹 거스름돈으로 동전이 생길 때면 아저씨의 빈바구니를 채우는 챙그렁 소리를 생각하며 마냥 맘이 설레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요 몇일 전부터 종각역 조계사 출구에는 이어폰을 꼽고 음악을 들으시던 검은안경의 아저씨는 보이지 않고 그 자리에 버려진 뚜껑 없는 낡은 골프가방만 놓여 있습니다.

아저씨가 왜 일하러 나오지 않을까요 어디 아프신가,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지난 겨울 그 추위에도 잘 견뎌 오셨는데 갑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아저씨의 빈자리가 아침 출근길을 허전하게 합니다.

아저씨와의 만남으로 인해 아침 출근길에 서로 같이 더불어 살고 있다는 즐거운 맘을 한번 내어보기도 하고 잠시나마 행복감을 느꼈는데 말입니다.

그저 제가 베푼 것이라 당돌한 생각을 했는데 사실 많이 받기만 한 것입니다. 그 아저씨가 저에게 매일 아침 좋은 선물을 베풀어 주신 것이지요, 그런 아저씨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김없이 봄이 왔는데 만물은 변함없이 생하고 생하는데 매일 아침 저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던 종각역 조계사 출구에서 춤추는 아저씨는 어디로 갔을 까요.

댓글목록

이디아l님의 댓글

이디아l 아이피 (222.♡.141.206) 작성일

프렌드님  좋은  선물  받으셨네요

  선물을  준  사람은  생하고  멸하지만
 
  한번  받은  선물은  영원하지요

  산천은  철따라  푸르르니
  사람도    철따라    맑아지네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1.♡.9.67) 작성일

프렌드님은 동화 작가로 데뷔하셔도 좋으실 것 같네예!!!
우리네 일상의 소박한 삶들을 글로써 풀어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네예!!!
재주 참 많으신니더. 계속 계속 올려 주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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